Journal [두리안] 첫 장면에 담긴 건축, 건축가가 작가와 감독이 된다면 썰토리텔링 2026-09-03 Keywords 두리안 썰토리텔링 첫장면 건축 영화와소설의건축이식 선셋대로 집의역할 미래품은집 시간전환장치 백년의고독 미래와과거공존 시간의흐름 위대한개츠비 이야기와건축유사성 첫장면건축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보여주거나, 주인공의 목소리로 문을 열기도 한다. 때로는 가장 강렬한 장면을 먼저 보여준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좋은 이야기는 일부를 의도적으로 감추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려주지 않은 채 독자와 관객을 점차 끌어들인다. 얼마 전 한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그 첫 페이지가 문득 궁금해 다시 펼쳐보았다. 처음 읽었을 땐 천천히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첫 장에는 주인공, 만난 우연, 그리고 그 우연이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가 이미 거침없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보여준 장들이 어떻게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향하는지 관찰하는 즐거움이었다. 이런 영화와 소설의 이야기를 건축으로 옮겨보자. 건축가가 설계자를 넘어 이야기의 작가이자 감독이 된다면, 과연 건축의 첫 장면에 무엇을 담을까.죽음의 경계에 놓인 건축영화 《선셋 대로 Sunset Boulevard, 1950》는 수영장에 떠 있는 시체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한 남자의 죽음을 먼저 보여주고, 그 남자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관객은 왜 죽었으며 어떻게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지 질문을 품는다. 하지만 건축이 주인공이라면, 죽음 자체를 먼저 보여주기보다 그 죽음이 벌어진 장소, 즉 노마 데스몬드의 저택부터 보여주는 것으로 바꾸어 놓을 것 같다. 화려하되 시간에 멈춘 듯한 공간, 오래된 가구와 빛바랜 흔적 속에 한때의 영광과 삶이 녹아 있는 집.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공간만 천천히 마주한다. 카메라가 저택을 천천히 빠져나와 수영장으로 향할 때, 떠 있는 시체가 보인다. 이제 관객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그 공간과 삶, 사건들을 함께 떠올린다. 그 순간 집은 배경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처럼 이야기를 담는다.미래를 품은 집, 시간의 전환 장치《백년의 고독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1967》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총살대 앞에 선 미래의 순간을 보여주고, 바로 그 기억을 어린 시절로 돌린다. 미래와 과거가 한 문장 속에서 공존한다. 이 이야기를 건축가의 시선으로 다시 각색하면, 인물보다 집을 먼저 보여주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작고 소박한 집이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이 늘고 방도 늘어난다. 가구가 자리를 잡고, 벽에는 시간이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는 떠나고, 빈방이 생겨나면서 집은 애니메이션처럼 변모한다. 30년 뒤의 집으로 시선이 옮기면, 나무는 크게 자라고 벽에는 아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래 사용한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지만, 관객은 아무 설명 없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집임을 느낀다. 곧이어 집도 나무도 없는 텅 빈 대지와, 그곳에 운명을 맞은 대령이 서있다. 집에 흐른 시간과 한 사람의 운명이 연결된다.사라진 꿈이 남긴 공간, 개츠비의 집《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1925》는 개츠비의 죽음이나 결말을 직접 제시하지 않고, 화자의 회고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성공담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좀 더 건축가의 시선에서 연출하자면, 개츠비보다 집부터 보여주고 싶다. 아무도 살지 않는, 하지만 꿈의 흔적이 깊이 밴 저택. 관리되지 않은 정원, 낙엽 떠 있는 수영장, 멈춘 시간의 상징들. 열린 문틈으로 화려한 샹들리에와 넓은 계단이 보이고, 정적 속에 멈춰 있다. 관객은 이 집에 누가 살았고 무엇을 기다렸는지 조용히 상상한다. 이어 가장 화려했던 파티 장면으로 돌아간 뒤, 다시 대지가 빈 상태로 넘어간다. 집은 단순한 부의 상징이 아니다. 그곳에는 되돌리고 싶었던 과거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고,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꿈이 남아 있다. 집은 한 사람의 꿈이 사라진 뒤에도 그 꿈을 기억하는 공간이 된다.첫 장면에 모든 것이 있다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기 전에 먼저 그 건물을 처음 마주할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떠올릴지 상상하며 첫 장면을 계획한다. 공간, 시간, 사람, 기억, 때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담길 수 있다. 이미 많이 보여주었는데도 궁금증을 자아내고, 이야기는 더 깊어진다. 좋은 이야기는 모든 걸 숨기는 데서 시작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보여주고도 강렬한 호기심을 만들 수 있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물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벌어질 이야기를 먼저 보여준다. 어쩌면 진정한 건축가는 그 건물을 설계하기 전, 처음 만나는 이의 ‘첫 장면’을 연출하는 작가이자 감독인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Paulo Mariotti]에디터 두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