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호 건축사: 건축가 이천승(1910~1992) 건축의 사회적 기틀을 마련하다 한국의 도시 풍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법과 제도이다. 1965년, 건물의 화려한 외형을 갖추기 전에 도면을 그릴 최소한의 규격과 법적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한 대한민국 정부는 처음으로 국가 공인 건축사 자격 제도를 신설했다. 이때 ‘제1호’ 등록번호를 받은 이가 바로 건축가 이천승(李天承, 1910~1992)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이후 한국 건축의 제도적 기반을 다졌다. 과장된 장식을 덜어내고, 기능과 구조의 본질에 집중하는 ‘절제된 모더니즘’을 지향하며, 한국 현대건축이 든든히 설 수 있는 땅과 뼈대를 세운 ‘건축가들의 건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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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공보실, 대한민국 건국 10주년 행정화보]장충체육관(1963) - 기술 자립을 증명한 80m 무기둥 돔1963년에 완공된 장충체육관은 국내 최초로 알루미늄 돔 구조를 도입한 실내 종합 체육관으로, 건축 기술의 한계를 넘은 대공간(Long-span) 구조의 대표작이다. 당시 컴퓨터 구조 해석도 없고, 대형 크레인조차 없었던 상황에서 건축가 이천승과 종합건축연구소 기술진은 순수 인력과 정밀한 역학 계산만으로 지름 80m에 달하는 무기둥 공간을 완성했다. 이 건축물의 핵심 기술은 막응력(Membrane Stress) 원리였다. 반구형 돔 지붕에 걸리는 하중을 위쪽 링과 아래쪽의 거대한 텐션링이 나누어 분산시켰고, 방사형 입체 격자 트러스 구조와 알루미늄 피복을 활용해 지붕 무게와 구조 부담을 최소화했다. 또, 잭다운(Jack-down) 공법으로, 정밀하게 용접한 후 받침을 서서히 내려 하중을 분배하는 혁신적 시공 방식을 적용해 한국 건축이 공공 인프라를 독자적으로 완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인 성과였다.장충체육관 전경과 2015년 리모델링 모습. 국내 최초 알루미늄 돔 구조로 지어진 이 건물은 리모델링을 통해 지하 2층부터 지상 3층까지 확장되어, 총 연면적 1만1429㎡로 스포츠와 문화 행사를 더 넓게 수용하며 기능과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국제극장(1957) - 관람 경험을 바꾼 가벼운 외피시민회관과 장충체육관이 규모와 구조 기술에 집중했다면, 1957년 완공된 국제극장은 ‘건축 경험’의 현대화를 선도했다. 기존 무거운 석조·전돌 대신, 유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커튼월(Curtain Wall) 외피를 전면에 내세웠다. 구조체와 분리된 가볍고 투명한 입면은 극장 건축에 신선한 모더니즘 미학을 이식했다. 내부에서는 한국 극장 최초로 관객석에 경사지형 ‘스타디움 방식’을 도입해 시야를 혁신적으로 개선했다. 건물의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사람이 공간을 체감하고 무대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디자인의 영역으로 확장한 사례이다. 국제극장은 1985년 철거되었으나, 서구 근대 건축의 공간 개념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국제극장은 서울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으로, 공간과 기능이 조화된 혁신적인 작품이다. 건물의 웅장함은 극장 앞 넓은 광장과 대형 분수대에서도 느껴진다. 유리 커튼월로 가볍고 투명하게 마감된 외관과 경사면에 배열된 스타디움식 객석은 새로운 관람 경험을 선사했다. [서울문화재단]신신백화점(1956) - 도시 보행과 몰(Mall) 문화를 열다신신백화점은 사업가 박흥식과 건축가 이천승이 손을 잡고, 전후 새로이 피어오르던 도심 소비문화의 새로운 공간적 틀을 제시한 작품이다. 개별 점포가 나열되던 당시의 전통적 상가 구조에서 벗어나, 내부 중앙 복도를 중심으로 매장들이 입체적으로 연결되는 국내 최초의 '개방형 유통 동선(Arcade/Mall)' 개념을 도입했다. 도로와 맞닿은 전면에는 통유리 커튼월을 적용해 시각적 개방감을 극대화했으며, 이는 1960년대 이후 서울 상업 빌딩 파사드의 전형이 되었다. 신신백화점은 단순 상업 공간을 넘어 사람들이 안팎을 오가며 걷고 바라보는 ‘도시적 보행과 소비’를 연결하는 현대적 쇼핑몰 문화의 출발점이었다.왼쪽에 신신백화점이 있고 그 옆에 화신백화점이 보인다. 신신백화점은 단순한 쇼핑 공간을 넘어 도시 상업 공간의 효율성, 개방성, 그리고 세련미를 갖춘 근대적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당시 도심 상업 시설 발전의 방향을 미리 보여준 혁신적인 건축물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울성장50년사 영상자료]한국 현대건축사에 남긴 위대한 시스템의 유산1960년 군사쿠데타 이후 건축가 이천승은 모든 정부 관련 요직에서 물러나 박흥식과 함께 부동산회사인 흥한도시관광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당시 주요 건축가들과 함께 남서울 도시계획을 입안하며 오늘날 강남 지역 도시계획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2년 타계한 그는 단순한 건축가를 넘어 도시와 건축 제도의 근간을 다진 거목으로 기억된다. 건축가 박길룡이 한국 근대건축의 씨앗을 뿌렸다면, 건축가 이천승은 그 씨앗이 무성히 자라고 꽃을 피우도록 단단한 뿌리인 법과 제도, 그리고 도시계획 체계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건축법과 도시계획법 등 주요 법령을 정비했고, 한국건축가협회를 창설하여 건축가의 자율과 권리를 확보했으며, 교육과 연구를 통해 현대건축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가 남긴 진정한 업적은 단순히 건물을 설계한 데 그치지 않고, 한국 건축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도면을 그리며 도시를 창조할 수 있도록 만든 ‘시스템’에 있다. 건축가들이 자유롭게 창조하고 발전할 수 있는 든든한 제도적 기반, 이것이 바로 한국 현대건축을 떠받드는 바탕이자 그의 위대한 선물이다.[참고 자료]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 아카이브경성의 건축가들 (김소연, 루아크, 2017)전후 서울의 재건과 모더니즘 건축 (서울역사박물관, 2012)한국건축사 종합록: 이천승 아카이브편 (대한건축사협회, 2005)1950–60년대 한국 대공간 건축의 구조적 특성 및 공법 연구: 장충체육관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2012)전후 서울 상업·문화시설의 미학적 특성: 커튼월과 유통동선의 도입 (한국건축역사학회지, 2012)한국근대건축사 (기문당, 2008) 에디터 스티브